8개월 만의 '새판' 짠 근로시간제 개편안...결론 '노사정 사회적 대화'로
주52시간제에 일부 업종만 연장근로 단위 확대...대화 요청에 한국노총 '사회적 대화' 복귀
정부가 근로시간제도 개선 방향을 다시 내놨다. 지난 3월 발표했다가 '주69시간' 역풍을 맞고 재검토에 들어간 후 8개월 만이다.
정부는 주52시간제 틀은 유지하되 일부 업종에 대해서만 노사 합의에 따라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연장할 수 있도록 근로시간제를 개선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주당 근로시간 상한 설정, 근로일간 11시간 연속휴식 등 건강권 보호 방안을 마련한다. 포괄임금 오남용근절을 위해 행정 역량에도 집중한다. 다만 포괄임금을 법으로 금지하는 것엔 선을 그었다.
세부적인 개선안은 노사정 사회적 대화를 통해 마련할 방침이다. 양대 노총은 근로시간제 개선 방안에 동의할 수 없다면서 대화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날을 세웠다. 그러나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은 고용부의 근로시간제 개선 방안 발표 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성희 고용노동부 차관은 13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근로시간 대국민 설문조사 결과와 향후 정책 추진방안을 발표했다. 설문조사 결과 발표는 성재민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맡았고 이성희 차관은 정책 추진방안을 설명했다.
국민 46.4%, 주 단위 이상 연장근로 "동의"...업종별 적용해야
고용노동부는 올해 6월부터 8월까지 석 달간 근로자 3839명, 사업주 976명, 국민 1215명을 대상으로 근로시간 대국민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지난 3월 정부가 발표한 근로시간제도 개편안이 장시간 근로 논란으로 좌초되자 근로시간제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세밀하게 청취하고 노동개혁 방안을 다시 마련하겠다는 취지다.
고용부는 노사와 국민의 의견을 진솔하게 듣기 위해 방문 면접 방식으로 조사를 실시했고 내용은▲근로시간 개편 방향 ▲현행 주52시간제에 대한 인식 ▲근로시간 실태에 관한 질문으로 구성됐다. 조사 대상은 근로자, 사업자, 국민 세 집단으로 나눴다.
조사 결과 연장근로 총량은 유지하고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확대하는 방안에 대해 국민 46.4%가 동의했다. 근로자는 41.4%, 사업주는 38.2%가 찬성했다. 동의하지 않은 비율은 근로자 29.8%, 사업주 26.3%, 국민 29.8%로 동의하는 비율보다 약 10%포인트 이상 낮았다.
일부 업종에 대해서면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확대하자는 방안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났다. 근로자는 43%, 사업주는 47.5%, 국민은 54.4%가 동의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에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확대해야 하는지를 질문한 결과 제조업(근로자 55.3%, 사업주 56.4%)과 건설업(근로자 28.7%, 사업주 25.7%)이 가장 높았다. 직종으로는 설치ㆍ정비ㆍ생산직(근로자 32.0%, 사업주 31.2%), 보건ㆍ의료직(근로자 26.8%, 사업주 22.8%), 연구ㆍ공학 기술직(근로자 22.2%, 사업주 26.4%)에서 응답 비율이 높았다.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확대하는 경우 근로시간 총량에는 변함이 없지만 일정 기간 몰아서 연장 근로가 가능해진다. 관련해서 건강권 보호 방안을 함께 물었다.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확대할 경우 근로자 건강권을 보장하는 방안으로는 '주당 상한 근로시간 설정(근로자 55.5%, 사업주 56.7%)'과 '근로일간 11시간 연속휴식(근로자 42.2%, 사업주 33.6%)'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가장 높았다.
근로시간 제도 개편에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사항으로는 노사와 국민 모두 입을 모아 '실제 일한 만큼 확실한 임금보장(근로자 57.0%, 사업주 49.5%, 국민 63.7%)'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평소보다 더 일했을 경우 확실하게 쉴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근로자 34.3%, 사업주 29.6%, 국민 44.8%)도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현행 주52시간제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 장시간 근로가 감소했고 업무시간에 대한 예측가능성이 높아졌지만 업무량이 갑자기 늘었을 때는 유연하게 대응하기 어렵다는 결과가 나왔다. 근로자 28%, 사업주 33%, 국민 39%가 유연한 대응이 어렵다고 답했고 근로자 44.2%, 사업주 44.6%, 국민 54.9%가 업종ㆍ직종별 다양한 수요를 반영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고 답했다.
주52시간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업주는 14.5%였다. 그러나 업종별, 사업장 규모별로 들여다봤을 때는 차이가 크게 나타났다. 사업시설 관리, 사업지원 및 임대 서비스업이 32.6%로 가장 높았고 제조업이 27.6%로 뒤를 이었다.
사업장 규모별로는 100인 이상 299인 이하 사업장이 40.3%로 가장 높았고 300인 이상이 30.6%, 30인 이상 99인 이하가 30.4%로 나타났다.
성 선임연구위원은 "전체적으로 주52시간제로 어려움을 겪은 사업주는 14.5%지만 업종이나 규모별로 살펴보면 예측하기 어려운 업무량 변동이나 일시적으로는 인력이 부족한 상황 등으로 해당 사업장에서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주52시간제로 어려움을 겪는 사업주는 포괄임금을 활용(39.9%)하거나 추가인력을 채용(36.6%)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수주를 포기(30.6%)하거나 법규정을 무시(17.3%)한다는 사업주도 있었다.
노사, 포괄임금 방안에 의견 엇갈려...정부 "법적 규제는 어려워"
포괄임금 사용 실태도 드러났다. 연장근로 시 일한 만큼 수당으로 지급한다는 응답이 근로자 52.5%, 사업주 62.1%로 가장 많았지만 근로자 29.4%, 사업주 19.8%는 포괄임금을 활용하고 있었다.
포괄임금을 활용하는 경우 근로자 48.3%, 사업주 58.8%는 약정 근로시간과 실제 근로시간이 같다고 답했다. 그러나 근로자 19.7%, 사업주 19.1%는 실제 근로시간이 약정한 근로시간보다 더 길다고 답했다. 실제 근로시간이 약정 근로시간보다 더 짧다는 응답은 근로자 14.5%, 사업주 9.1%로 나타났다.
포괄임금 개선방안을 묻는 질문에서는 노사의 의견이 갈렸다. 근로자는 근로시간을 기록ㆍ관리하도록 하고 이를 기반으로 임금을 산정하는 법원칙을 확립해야 한다는 응답이 44.7%로 가장 높았다. 반면 사업주의 41%는 현행 유지에 손을 들었다.
성 선임연구위원은 "주52시간제가 현장에 안착되고 있지만 다양한 업종ㆍ직종별 수요를 반영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있었고 일부 업종에 연장근로 관리 단위 확대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조사 결과에 나타난 일부 업종과 직종 등을 고려해 연장근로 관리단위 선택권을 부여하는 정책 방향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포괄임금에 관해서는 노사, 노노 간 다양한 이해관계가 확인된 만큼 포괄임금 오남용은 반드시 근절하되 구체적인 개선방안에 대해서는 현장에서 수용 가능한 섬세하고 정교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용부는 이번 설문조사 결과를 전폭적으로 수용해 근로시간제 개선방안 내놓을 계획이다. 주52시간제는 유지하면서 일부 업종ㆍ직종에 한해 개선방안을 마련한다. 개선방안은 모두가 공감하고 현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사정 대화를 통해 논의하겠다는 입장이다.
고용부는 포괄임금 오남용을 뿌리 뽑겠다고 강조했지만 포괄임금제를 법으로 금지하는 것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 차관은 "정부는 최우선적으로 포괄임금 오남용을 근절해 일한 만큼 확실하게 보상받는 관행을 정착시켜 나가겠다"면서도 "수십년간 현장에서 형성된 포괄임금 계약 관행과 노사, 노노 간 복잡한 이해관계를 고려하면 포괄임금 계약 자체를 금지하는 입법적 규제는 현장의 혼란과 갈등을 야기해 실효성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고용부는 이미 포괄임금 오남용 단속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고용부는 '포괄임금 오남용 익명신고센터'를 통해 제보받은 사업장을 대상으로 기획근로감독을 실시했다. 그 결과 포괄임금 오남용 의심 사업장 87개소 중 64개소에서 임금체불을, 52개소에서 연장근로 한도 위반을 적발했다.
돌고 돌아 사회적 대화?...한국노총, 사회적 대화 참여
고용부는 근로시간 제도 개선이 시급한 업종과 직종을 세부적으로 선정하기 위해 객관적인 실증 데이터와 추가 실태조사가 필요한 만큼 노사정 사회적 대화를 신속하게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이 차관은 "근로시간 제도 개선은 국민의 일하는 방식과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치는 변화인 만큼 책임감을 갖고 신중하게 추진해 나가겠다"며 "노동단체와 경제단체 모두 실근로시간 단축, 근로시간 선택권 강화, 공정한 보상 등에 대한 노사정 사회적 대화에 적극 참여해 주실 것을 간곡히 요청드린다"고 말했다.
노동계 반응은 싸늘하다. 근로시간제 개선 방향에 동의할 수 없고 사회적 대화에도 참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은 중앙의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20여 년째 고수하고 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이날 입장문에서 "설문조사 문항은 전반적으로 주52시간제의 문제점 및 애로사항을 설명하고 그래서 정부가 추진하는 연장근로 단위기간 확대 방안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유도하는 방식"이라며 "정부가 개편방향을 확정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국민들 대다수가 반대하는 노동시간 개악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이어 "노동시간 개편을 일방적으로 추진하지 않겠다는 정부 입장은 긍정적이고, 충분한 의견수렴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공감한다"면서도 "그러나 근로시간 제도 개편이 필요한 업종ㆍ직종을 선정하겠다는 정부의 노동시간 개악 명분용 노사정 대화는 참여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은 돌연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겠다고 방침을 변경했다. 한국노총은 지난 6월 정부의 노조 탄압에 대한 불만으로 경사노위 참여를 중단한 바 있다. 한국노총은 이날 고용부 발표에 비판적 입장을 내놓고 사회적 대화에도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내놨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겠다고 결정했다. 대통령실의 사회적 대화 참여 요청에 대한 응답이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처음 고용부 발표 당시에는 "국민 6030명을 대상으로 전례 없는 대규모 면접조사를 했다며 신뢰성을 포장했지만 원하는 답을 받으려는 의도된 질문을 나열했고 뻔한 결과가 나왔다"며 "답을 정해놓고 듣고 싶은 말만 듣겠다는데 참여할 노동계가 어디인지 되묻고 싶다"고 날을 세웠다.
그러나 이내 "한국노총은 사회적 대화 복귀에 대한 대통령실의 요청에 대해 사회적 대화에 복귀하기로 했다"며 "우리 사회는 급격한 산업전환과 기후위기, 저출생·고령사회 문제, 중동전쟁 등으로 인한 불확실성과 저성장 쇼크의 장기화 등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한국노총은 사회적 대화에 복귀하여 경제 위기 등에 따른 피해가 노동자에게 전가되지 않도록, 노동자의 생존권과 노동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고 입장을 변경했다.
사회적 대화의 방식이 '합의'일지 '협의'일지도 문제다. 합의를 원칙으로 한다면 노동계가 대화에 참여한다 해도 결론에 이르기는 쉽지 않다. 정부는 당초 노동개혁을 추진하면서 노사정 대화보다는 전문가 의견을 듣기를 택했다. 전문가로 꾸려진 미래노동시장 연구회를 출범시켰고 그 논의를 바탕으로 정부가 제도 개편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첫발부터 노동계와 여론의 역풍을 맞았고 정부는 대국민 설문조사를 바탕을 새로운 제도 개편 방안을 준비하게 됐다. 그렇게 돌고 돌아 돌아온 결론이 '사회적 대화'다.
고용부는 노사정이 함께 마주 앉는 자리를 만드는 것을 근로시간제 개편의 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 차관은 "근로시간 제도 개선은 국민 2000만 명 이상이 관계되는 법 조항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노사의 수용성이 가장 중요하고 따라서 노사정 사회적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원칙이다"라며 "이번 기회에 노사정 사회적 대화에 노사단체가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실 것을 정중하게 요청드린다"고 말했다.
이 차관은 합의일지 협의일지는 사회적 대회를 통해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차관은 "합의를 전제로 할 것인지는 사회적 대화를 진행하면서 결정해야 할 내용"이라며 "합의인지 협의인지 보다는 사회적 대화 과정에서 노사가 얼마나 공감대를 구축했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노사의 충분한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합의냐 협의냐가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제도 개선에 분명한 추진 동력으로 작동할 것이라 생각한다"며 "속도는 조금 늦어질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노동개혁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갈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고 굳건하게 그 노동개혁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경영계는 이번 개선 방향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3월 발표했던 근로시간제 개편안에 못 미치는 내용이라는 이유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지난 3월에 발표한 근로시간제도 개편안에 못 미치는 내용이고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하지 않아 아쉽다"며 "조사 결과 현행 근로시간제도로는 갑작스러운 업무량 증가 등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어렵다는 현장의 실태가 확인됐고 상당수 국민이 연장근로 관리 단위 확대를 원하는 만큼 근로시간 제도 개선을 조속히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언급한 건강권 보호 조치를 도입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경총은 "연장근로 개편 논의 시 근로자의 건강 보호 문제도 함께 검토돼야 하지만 지나친 주당 근로시간 상한 제한 등 과도한 조치는 노사의 근로시간 선택권을 제약해 제도 변경의 취지를 퇴색시킬 수 있어 현장의 다양한 상황과 수요를 반영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출처 : 월간노동법률 이지예 기자]